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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ok Review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2025-02-06

사랑의 기술 - 에리히 프롬

이 책을 읽기로 마음 먹은건 알랭 드 보통의 소설에서 등장한 주인공의 모습과 똑같았다. 이별을 겪고 그 이유를 설명하려고 하는 합리주의적인 접근. 내면에서 끓어 오르는 압박과 흉통은 놀랍게도 보편적이었다.

합리주의, 절대주의로서의 과학에서 나와 가장 먼저 잡은 동앗줄 같은것이 ‘사랑’. 더 포괄적인 말로 ‘낭만’ 이었다. 이제야 진리와 사실만을 쫒던 과학에서 벗어나 인간다워졌다고 자신하면서 사랑을 제 1가치로 선언했다.

이 관념은 매우 공격적으로 내 자아를 잠식하기 시작했고 낭만주의는 자아와 융화되었다. 내가 곧 낭만주의였고 낭만주의가 곧 나인 지경. 절대가치를 사랑으로 내세우는 일원적인 발상이 지난 과학에 대한 충성심과 다르지 않다는것을 정말 최근까지도 알지 못했다.

이제 자아를 잠식하던 공격성은 밖으로 표출되어 낭만적 테러리즘에 이르렀다. 사랑이 얼마나 공격적일 수 있는가 배워갔다. ‘매력적으로 보이지 않는 사람을 유혹하는 것이 더 쉽다’ 는 사랑의 아이러니가 마치 알을 깨고 나오라는 신의 계시이자 선물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테러리즘의 과정을 거치고서야 내가 사랑이 무엇인지 모른다는 것을 자각했다. 그리고 이상적인 사랑의 형태가 정의되어있는지 미치도록 궁금했고 찾아나서기 시작했다. 나중에 니체의 철학이나 책을 돌아볼 때 또 말하겠지만 인간은 항상 무언가에 잠식되어있지 않은가 검토하고 성찰할 필요가 있다. 지난 나는 상당히 위험한 위치에 서있었다.

서론이 길었다. 이 책을 읽기로 다짐하기까지의 이야기가 내 자서전에 꽤 중요한 부분이라 주절주절 써내려간듯 하다. 본격적으로 책에대해 돌아보자면 고백할 것이 있다. 나는 이 책이 담고있는 내용의 한 70%정도를 이해한 것 같다. 그중에서도 기억하고 인식으로 스며든것은 한 40%정도 되는것 같다. 그만큼 이 책의 내용이 방대하고 reference가 많다는 의미이다. 원서로도 꽤 복잡한 어휘들인데 번역본으로 읽으니 솔직히 뇌에 무리가 좀 갔다. 언젠가. 사실 조만간 한 번 더 읽어야 할 책이다.

가장 기초적인 이론은 사랑이 ‘합일’을 위한 인간의 본능이라는 해석이다. 구약성서의 내용과 같이 인간은 자연에서 분리되었고 태생적으로 분리불안을 품고 산다. 그렇기 때문에 ‘나’라는 개념을 확장하려는 시도와 ‘나’같은 것을 찾아내려는 본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사랑은 단순히 외로움을 극복하기 위한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실존에 대한 문제라는 것이다. 나는 이 점은 이미 많은 작품에서 느껴왔다. 쏟아지는 작품과 문학이 모두 ‘사랑’을 외치고 결국 사랑이었다는 결론을 내는것은 인간 실존의 문제가 그곳에 있다는 증언이기도 하다.

이런 사랑의 특성과 본질에 인간은 쉽게 사랑에 수동적인 존재가 된다. 자신이 사랑하지 못하는것은 내가 사랑할만한 존재가 아직 나타나지 않았기 때문에. 사랑의 성패가 정확히 대상에 의해 결정된다고 생각한다. 운명적 만남을 고대하며 서서히 죽어갈 모습에 에리히 프롬은 강력히 저항했다.

인간은 어느 분야에서든 주체적으로 성장해온 것처럼 사랑에도 능동적인 자세를 취해야한다. 사랑은 ‘빠지는’ 것이 아니라 ‘행하는' 행위이다. 따라서 누군가를 사랑하는 것은 그/그녀 를 통해 세상의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며, 연인의 아름다움 때문에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사랑하기때문에 아름다워 보여야한다. 낭만주의에서 이루지 못한 사랑의 영원성을 프롬은 관념을 뒤집어 이루고자 한 것이다.

이상적으로 보이지만 나에겐 매우 어려운 문장들이다. 이해는 하지만 쉽게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이는 곧 앞으로 내 내면에 대한 관찰과 사색을 통해 욕망과 사랑을 구분해야한다는 것을 시사한다.

사랑이 ‘합일 하려는 본능’에 기초하기 때문에 인간은 이를 소유욕으로 왜곡해왔다. 왜곡이 극단으로 치닫았을 때 ‘공서적 합일’ 이라는 기이한 형태의 관계가 형성된다. 이러한 공서적 관계는 성적으로 발현되기도 하며 가학적 음란증(Sadist)과 피학적 음란증(masochist) 으로 불린다. 이는 지나친 자본주의의 발전과 미국식 실용주의의 확산의 부작용으로 보인다. 사랑이, 연애가 시장성을 띄기 시작하면서 인간 실존에대한 문제에 기계적 세계관이 들어선 것이다. 공서적 합일에서는 한쪽은 한없이 소유하려고 하고 한쪽은 지배당하려고 한다. 가해자와 피해자가 아니라 둘 다 자기 자신에 대해 가해자인 관계이다. [피지배자가 이를 거부하려하지 않기 때문이다.] 한 명이 완전히 다른 하나에게 소유되면 관계가 오래 지속될 것 같지만 지배자의 공격적인 성향이 더이상 지배할 마찰점을 찾지 못했을 때 대상 자체로 방향을 바꾸어 관계를 종말시킨다.

모든 사랑의 시작에 공서적인 요소가 없다고 단언할 수 없다. 우리가 느끼는 설렘과 두근거림이 소유욕의 발현이나 동물적인 본능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행복과 쾌락을 구분하는 것처럼 설렘은 쾌락과 마약에 가깝다. 도파민은 사실 불안한 상황에 분비되는 호르몬이다. 가질 수 없는 것을 마주했을 때 본능적인 두려움과 소유욕/정복욕이 곧 설렘이라는 생각이다. 따라서 설렘을 사랑이라고 정의하거나 추앙할 가치로 내세우기에는 환상에 가깝다.

따라서 프롬은 이런 공서적 성격을 가진 관계가 온전하지 않다고 주장한다. 그는 개개인의 독립성과 자아를 인정하면서 하나의 존재로 합일하는 관계를 지속 가능하고 이상적인 사랑이라고 말한다. 앞 문장이 모순같지만 조금만 돌아보면 가능한 얘기임을 알 수 있다. 언제나 ‘자본주의적 소유욕’이 아니라는 전제하에서 말이다.

이상적이고 성숙한 사랑의 여러 형태를 제시하면서 자신의 주장에 힘을 싣기 시작한다. 자기애, 형제애, 모성애, 부성애, 이성애와 신을향한 사랑까지. 다양한 형태의 사랑을 하나하나 기술한다. 흥미로운점은 모성애는 조건없는 무조건적인 사랑을 의미하고 부성애는 자격을 갖추어야 받을 수 있는 성격의 사랑이라는 해석이다. 우리는 안정적인 가정에서 성장했을 때 이 모성애와 부성애를 함께 가지게 된다. 즉 내 안에 어머니와 아버지가 있다는 말이다. 내 가슴에 두 존재가 모두 기능할때만 성숙한 사랑이 가능하다고 말한다.

더 나아가 인식론적인 접근을 감행한다. 우리는 본질에 대해 말할 수 없으며 이분법적인 접근은 사실 환각과 다르지 않다는 설명이다. 사랑과 증오가 만들어 내는 결과와 행동이 다르지 않고 설렘과 불안이 같은 호르몬으로 작용한다는 사실은 선과악 처럼 인간의 관념이 만들어낸 추상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절대적인 사랑과 증오를 구분하려는 시도를 할 것이 아니라 모든것을 사랑할 수 있도록. 내면에서 사랑을 행해야한다는 말이다.

결론적으로 사랑하기위한 기술은 겸손, 객관성, 이성의 발달을 말한다. 무력한 인간이 필연적으로 가지는 왜곡에 도취되지 말고 객관의 눈으로 바라보도록 노력해야한다는 말이다. 또 신앙을 합리적 신앙과 비합리적 신앙으로 구분하면서 맹목적으로 믿고 종속되는 삶. 불가항적인 힘에 억눌리는 듯한 신앙을 피해야한다고 말한다. 모든 행동과 사색의 주체가 되어야하며 어느 하나에 깊이 빠져버리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는 말처럼 들리기도 한다.

메모한 부분을 다시 읽어보지만 여전히 어렵다. 그만큼 깊은 고민이 담긴 책이고 다시 읽을만한 가치가 있는 책이다. 많은 지혜와 관점을 제시한 이 책을 나는 깊은 책장에 보관하지 싶다.